마인어(말레이-인도네시아어)에 바하기(bahagi)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나누다, 베풀다'는 뜻이죠. 범어 바가(भग bhága)에서 왔는데요, 바가에는 물론 나눈다는 뜻도 있습니다만 '행복', '부'의 뜻도 있고 나아가 신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불교에서 부처를 흔히 세존(世尊)이라 칭하지 않습니까? 이 세존의 범어가 바가완(भगवान्bhagavān), 즉 바가를 가진 이(वान् vān)라는 의미입니다. 

나눈다는 것과 부, 또 신과는 무슨 관련일까요? 이 단어의 원시인구어 어근 *bhag-은 나눈다는 뜻으로, 아마 분배의 의미가 먼저였던 듯 합니다. 아마 '무언가를 분배하는 자' -> '분배(권)을 소유한 자' -> 위대한 사람 -> 신, 뭐 이런 식의 의미확장이 아닌가 합니다. 

범어와 같은 인도이란어족에 속하고 현대 페르시아어(이란어)의 전신인 아베스타어를 보면 이 문제는 더 확실해집니다. 아베스타어의 baɣa-는 '부분, 몫'이라는 뜻인데 '신'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인도어와 이란어는 과거에 동일한 문화권과 종교에 속했으니, 그 문화에서는 무언가를 분배할 권한을 지닌 이가 위대한 자로 추종되었던 것일까 하고 추측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개념은 영어의 로드(lord, 主)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듯 합니다. 로드는 고대영어 hlāfweard에서 왔는데요, 이는 '빵을 관리하는 이'라는 뜻입니다. 즉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빵(나아가 음식)을 분배하는 이의 이름이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쓰였다는 것이죠.

어쨌든 아베스타어의 baɣa-는 여러 방면에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단 노어가 페르시아어에서 이런저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단적인 예로 노어로 신을 뜻하는 단어가 보그(бог)입니다. 두말할 것 없이 페르시아어에서 온 것이죠. 또한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بغداد‎)도 페르시아어로 '신(بغ)이 주었다(داد)'는 페르시아어에서 따온 이름이라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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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회에서는 원시인구어 어근 *geus-의 '맛보다'와 '시도하다'의 이중성에 대해서 얘기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인구어 어근 *sep-의 비슷한 의미론적 이중성에 대해서 얘기해볼까 합니다. 이 어근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1. 맛보다

2. 인식하다

영어로 맛은 테이스트(taste)지만 세이버(savor)라는 단어도 있습니다. 세이버리(savory)라고 하면 맛있는, 짭짤한 등의 의미죠. 이는 프랑스어 사뵈르(saveur, 맛)에서 온 것으로, 라틴어 사페레(sapere)에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sapere는 원래 맛보다는 뜻이었지만 후기 라틴어로 가면 '알다'는 뜻도 지니게 됩니다. 사뵈르 외에 불단어 사부아르(savoir, 알다, 할 수 있다)나 이탈리아어 사페레(sapere) 등 역시 이 단어에서 온 것이죠.

로망스어에 익숙하지 않은 분이라도 이 라틴어를 어디선가 분명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류의 학명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입니다. sapiens는 sapere의 현재분사로, 아시다시피 '현명하다'의 뜻이죠.

인구어에서 '맛보다'가 '알다'나 '인식하다', '현명하다'의 뜻과 이렇게 광범위하게 연관되는 게 참 흥미로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음식을 제대로 맛볼 줄 아는 것이 무언가를 아는 방식이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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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스터스 초이스, '맛보는 이의 선택'


원시인도유럽어 어근은 *geus-에는 크게 세 갈래의 뜻이 있습니다.


1. 맛보다

2. 시도하다

3. 즐기다


전혀 관계없는 의미로 보이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서로 연관있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왜, 한국어에서도 '맛보기'라는 단어를 '시험해보기'라는 의미로도 쓰지 않습니까? 반대로, 영어의 트라이(try, 시도하다)에도 '맛보다'는 의미가 있구요. 그런 개념의 혼재가 아닐가 합니다. 

인도유럽어족의 파생언어는 대체로 이 세 의미 중 일부를 선택하여 발전시킨 듯 합니다. 꽤나 흥미로운 주제이기에 이러한 의미론적 변화 역사를 얘기해보고자 합니다.


1. 게르만어 - kausjan(고트어)

고트어라는 게르만어의 일파가 있습니다. 한때는 유럽 전역에서 쓰이다 6세기에 고트족이 프랑크족에 패하면서 점점 기울어가더니 8, 9세기경에 사멸했지요. 기록으로 남아있는 게르만어 중에서는 가장 오래되었으면서도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멸했습니다. 그러나 워낙 유럽 여기저기 퍼져있던 고트족이라 그런지 다른 게르만어 뿐만이 아닌 로망스어, 슬라브어계통 언어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러시아어로 '먹다'는 쿠샤치(кушать)입니다. 이 단어는 고트어에서 온 것으로, 고트어 kausjan은 '시도해보다, 맛보다'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트어 단어는 불어의 슈아지르(choisir, 선택하다)로도 변화되었습니다. 이 슈아지르 내지는 슈아(choix)에서 영어의 '선택하다'의 뜻인 추즈(choose)와 '선택'의 초이스(choice)가 되었구요.

즉 '시도해보다/맛보다'의 중의적인 의미의 단어가, 노어에서는 전자의 의미를 중심으로 발달하였고, 불어에서는 후자의 의미를 중심으로 발달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고트어 외에도 다른 게르만어에도 이 계통의 단어가 있습니다. 독일어 코스튼(kosten, 맛보다) 등이 그 예지요.


2. 로망스어 - gustus(라틴어)

이 어근에서 또한 라틴어 구스투스(gustus, 맛보기)라는 단어가 나오고, 여기에서 로망스어로 '맛'을 뜻하는 단어가 파생됩니다. 이탈리아어 구스토(gusto), 불어 구(goût) 등이 있지요. 스페인어로 구스타(gustar)하면 '마음에 들다'라는 뜻의 동사지요. '미 구스타(mi gusta)'는 '마음에 들어, 좋아'라는 뜻입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한국 도시 '대구'의 이름을 들으면 실소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불어로 '역겨움, 질림, 짜증남'을 의미하는 데구(dégoût)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지요. '구'에 부정형인 데(dé-)가 붙은 것인데요, 이 단어는 영어로 건너가서 혐오, 징그러움을 의미하는 디스거스트(disgust)가 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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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뜻하는 그리스어 코스모스(κόσμος)는 한번쯤 들여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형수술의 영어명은 코스메틱 서저리(cosmetic surgery)지요. 코스모스와 코스메틱은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우주와 성형수술의 관계는 무엇일까?

사실 코스모스의 원뜻은 '질서'입니다. 피타고라스가 처음으로 이 단어를 '우주'의 의미로 사용했다고 전해져오는데요, 우주를 일종의 (수학적) 질서로 본 피타고라스의 우주관이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죠.

그런데 질서가 있는 것은 이 우주뿐만이 아닙니다. 무언가를 아름답게 하려면 질서정연하게 정리하고 꾸며야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코스모스는 여성의 미용이라는 뜻도 지니게 되었습니다. '코스메틱 서저리'는 사람의 혼돈스러운(?) 얼굴에 질서(?)를 가져다주는 수술인 것일까요?

그렇다면 질서의 반대말, 혼돈의 그리스어는 무엇일까요? 카오스(χάος)입니다. 어감이 멋지기도 해서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도 여기저기 써먹는 단어죠. 그런데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늘상 사용하고 있는, 카오스의 사촌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가스'(gas)입니다.


Halitum illud gas vocavi, non longe a Chao veterum.

옛사람들의 '카오스'에 가까운 이 연기를 나는 '가스'라고 불렀다.


이산화탄소를 발견한 네덜란드 화학자 얀밥티스트 판 헬몬트(Jan-Baptiste van Helmont, 1577-1644)의 말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질서정연한 '코스모스'와는 반대되는 혼돈을 '연기'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고, 판 헬몬트도 그런 것을 연상한 것이 아닐까요. 게다가 사실 '카오스'는 영어식 발음이고, 그리스어로는 '하오스' 비슷한 발음이 납니다. 그런데 네덜란드어의 g도 비슷한 발음이 난단 말이지요. 네덜란드인 축구감독 거스 히딩크의 Guss도 사실 '후스' 비슷하게 읽는다는 것은 아시겠지요. 그래서 이 사람도 g자를 쓰지 않았나 합니다. 물론 영어/불어를 통해 들여온 우리는 '가스'라고 부르고 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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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어로 토마토는 뭘까요? tomato? 포모도로(pomodoro)라고 합니다. 풀어쓰면 pomo d'oro인데요, pomo는 멜라(mela)와 마찬가지로 '사과'라는 뜻이고, 오로(oro)는 황금의 뜻입니다. 즉 토마토는 '황금사과'인 것이지요.

저번에 오렌지를 '중국 사과'라고 이름붙인 네덜란드인들이나, 토마토를 '포르투갈 감'이라 부른 한국인들의 기상천외한 센스에 대해서 다루어봤는데, 토마토를 '황금사과'라고 부른 이탈리아인들의 센스는 못 뛰어넘을 것 같습니다. 덜 익은 토마토의 불그스름한 노란빛을 보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금빛 사과라도 상상했던 것일까요?

한편 석류는 영어로 폼그레네이트(pomegranate)라고 하지요. 중세 라틴어로는 포뭄 그라나툼(pomum granatum)였는데, 포뭄은 아시겠지만 사과라는 뜻이고, 그라나툼은 '씨 많은' 혹은 '검붉은' 뜻이라고 합니다. 즉 석류는 '씨 많은 사과'라는 것입니다.

정작 프랑스에서는 '폼'은 쏙 빼먹고 그르나드(grenade)라고 석류를 부르고 있습니다. 한편 수류탄이라는 무기가 등장하면서 프랑스에서 누구인지는 몰라도 이걸 보고 석류와 비슷하게 생겨먹었다고 생각을 한 듯 합니다. 그래서 수류탄을 '석류'라고 불렀지요. '전방 석류!'인 겁니다. 그게 또 영어권으로 전해지면서 그레네이드(grenade)가 되었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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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어(말레이-인도네시아어)가 얼마나 다양한 어원의 언어인지 나타내기 위해 흔히 드는 예가 '책'을 뜻하는 마인어 단어입니다. 똑같은 책인데 범어에서 온 푸스타카(पुस्तक pustaka), 아랍어에서 온 키탑(كتاب kitab), 네덜란드어에서 온 부쿠(buku)라는 3가지 단어가 있지요. 물론 세 단어 각자 어감이 다르구요.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이기도 했기에 특히 네덜란드어에서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부쿠(buku)라고 하면 영어 북(book)을 콩글리시로 읽은 것 같지만 사실은 네덜란드어 부크(boek)에서 온 것입니다.

네덜란드어가 영향을 끼친 언어는 인니어뿐만이 아닙니다. 현대 벨기에가 불어/네덜란드어가 공용으로 쓰이는 국가인 것에서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네덜란드어와 불어는 항상 이웃 언어였고 이들이 서로 주고받은 영향은 의외로 큽니다.

네덜란드에는 지소사(指小詞)가 특히 많이 쓰입니다. 그러니까 부크에 접미사 -je를 붙여 boekje라고 하면 '작은 책'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게 꼭 크기가 작다는 의미가 아니더라도 뭔가 덜 중요한, '책 한 권 쯤'의 뜻이 되는 것이지요. 

중세 네덜란드어의 boek의 지소형은 boeckijn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불어로 건너가서 부캥(bouquin)이 되지요. 지금은 그냥 리브르(livre)와 차이없는 '책'이라는 뜻입니다만 옛날에는 '고서(古書)'라는 의미였나 봅니다. 네덜란드를 통해 희귀한 장서를 들여왔던 것일까요? 이와 연관된 부키니스트(bouquiniste)라는 '헌책상인'라는 단어도 있습니다.

인터넷 시대가 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책은 우리의 생활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중요한 물건인데도, 의외로 많은 언어에서 책이라는 단어가 외래어인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어의 '책(冊)'만 하더라도 중국에서 왔으니까요. 일본어의 혼(本)도 뿌리 본(本)의 독음이고, 일의 근본, 기초라는 뜻에서 그 기초, 규범을 가르쳐주는 책이라는 뜻으로 변화된 것이니, 궁극적으로는 중국에서 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책이라는 단어를 들여온 게 어찌보면 동아시아 언어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러시아어로 책은 크니가(книга)인데요, 어원은 불분명합니다. 고대 스칸디나비아어로 규범, 지식 등을 의미하는 kenning에서 온 것이라는 사람도 있고, 또 터키어 küin에서 온 것이라는 사람 있는데, 이 터키어 단어는 중국의 책 권(券)을 통해 온 것일수도 있다고 하네요. 현대 한어로는 '취앤'인데 상고발음은 '크니가'에 얼마나 가까웠는지 모르겠네요. 심지어는 券이 아니라 고전인 시경(詩經)의 발음의 변형이라는 설도 있는데...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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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어를 비롯한 슬라브어에서, 독일어를 비롯한 게르만어에서 단어를 많이 빌려왔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서로 이웃동네 사람들이니까 당연할 수 밖에요. 그런데 얘네들이 서로를 부르는 명칭을 들어보면 그다지 사이가 좋지만은 않았나 봅니다.

일단 슬라브족(Slav族)라는 표현을 보고 영어로 노예를 뜻하는 슬레이브(slave)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궁금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슬레이브'가 '슬라브'에서 온 것입니다. 10세기의 신성로마제국의 독일계 왕 오토 1세와 그 후계자들이 슬라브족들과 전쟁을 벌여 그들을 노예로 팔아먹었기에, 슬라브족의 라틴어 이름인 sclavus가 노예를 뜻하는 명사로 온 유럽에 퍼진 것이죠. 영어 슬레이브 뿐만이 아니라 불어 에스클라브(esclave), 독어 스클라베(Sklave) 등등...

그런데 슬라브족도 만만치 않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영어로 저먼(German)이죠? 불어로는 알망(allemand)이고요. 정작 독일인들 자신은 도이치(Deutsch)라고 자칭하는데 말이죠. 저먼이야 '게르만'족의 영어식 발음이고, 알망은 게르만 부족 중 하나인 알레마니족의 이름이 독일인들 전체의 이름으로 굳어진 경우입니다.

그런데 러시아어에서는 녜메츠(немец)라고 부릅니다. 대부분의 슬라브어에서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건 어떤 특정한 부족 이름이 아니라 일종의 의성어입니다. 마치 말 제대로 못하는 벙어리나 아기가 네네메메거리는 소리에서 따온 것이죠. 즉 원래는 러시아어를 잘 못하는 외국인들을 총칭하는 표현이었는데 이게 독일인들의 이름으로 굳어진 경우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그리스어를 못하는 이방인의 언어를 흉내내 '바르바로이'라고 부른 것이 '게르만인'의 호칭이 된 경우도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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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ve Canem (개조심)

카나리아는 그 모습이 고와서 애완용으로 기르기도 하는 새입니다. 아프리카 서쪽의 스페인령 Insula Canaria라고 하는 섬의 새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는데요, insula는 라틴어로 섬이라는 뜻이고, canaria는 카나리아... 라는 뜻이 아니라 '개(犬)의' 라는 뜻입니다. 그 섬에 사는 개들이 유독 덩치가 컸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지어줬다고 하네요. 즉 카나리아라는 이름은 어떻게 보면 '개새'가 되는 것이죠.

라틴어로 개를 뜻하는 canis는 꽤나 유명한 단어입니다. 일단 폼페이 유적의 유명한 개조심 글귀 cave canem(개 조심하시오)가 있지요. 영어로 캐나인(canine) 하면 개와 관련된 것을 뜻하기도 하고요. 

한여름인 지금 폭염에 시달리시는 분들도 많을 듯 한데요, 불어로 폭염은 카니퀼(canicule)입니다. 라틴어로 카니쿨라(canicula)라고 하면 작은 개를 의미하는데, 별 시리우스의 이칭이기도 합니다. 7월 24일부터 8월 24일까지는 시리우스가 태양과 같은 시기에 뜨고 지기 때문에 고대인들은 이 별과 폭염이 뭔가 관련있나보다 생각해서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지요. 한국에서 한창 더울 때면 개를 잡아먹는 것도 혹시 이것과 관련이 있을 지도...? 는 농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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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모임'을 뜻하는 '분트'(Bund)라는 독단어는 한번쯤 직간접적으로 들어볼 일이 있었을 겁니다. 일단 독일 축구 리그명이 분데스리가(Bundesliga)죠. 또 독일연방공화국의 독어명이 뭐지요? 분데스레푸블리크 도이칠란트(Bundesrepublik Deutschland)입니다. 공화국(Republik)이 여럿이서 뭉치면(Bund) 연방이 되는 겁니다. 정 생소하다면 영어의 바인드(bind, 묶다)나 밴드(band, 묶임) 등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그런데 노어에도 분트(бунт)라는 단어가 있는데요, 중세독일어에서 폴란드어를 거쳐서 온 단어입니다. 재미있게도 '반동, 혁명'이라는 뜻입니다. 요즘에야 사람들이 모이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중세 폴란드 및 러시아 사람들은 사람이 여럿 모이면 반동분자들이 역적모의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나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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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 가면 칩사이드(Cheapside)라는 거리가 있습니다. 영국의 지명이 원래 좀 괴상하긴 하지만, 칩사이드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좀 웃긴 이름이죠. 치프(cheap)라니, 그 거리의 집은 집값이 싼 것일까?

현대영어에서 '저렴하다'를 의미하는 치프(cheap)는 '거래' 혹은 '시장'을 뜻하는 고대영어 ceap에서 왔습니다. '잘 한 거래', 즉 god ceap(good cheap)를 관용적으로 사용하다 보니 아예 ceap 자체가 저렴함을 뜻하게 된 것이죠. 즉 칩사이드는 싸구려 거리가 아닌, 아마도 장이 서는 시장거리였던 것이겠죠.

또 행상인을 뜻하는 챕맨(chapman)도 ceapmann에서 온 것입니다. 영국하고 호주에서 그냥 아무 남자나 부를 때 챕(chap)이라고 부르는 것도 챕맨의 축약형이구요.

그럼 ceap은 어디서 왔는지 살펴봅시다. 라틴어로 '소상인', '행상인', '여관주인'등을 의미하는 caupo에서 빌려온 것이라 합니다.

영어가 라틴어에서 엄청나게 많은 수의 단어를 빌려온 것은 맞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서 꾸준히 들어왔고 라틴어에서 직접 들여온 것, 불어/이태리어를 경유해서 들여온 것 등 같은 라틴계 단어라도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한국어의 한자 단어라도, 초기에 들어와서 한자 규범의식이 사라진 것('묵墨 -> 먹', '필筆 -> 붓' 같은 예)부터 시작해서, 중국에서 바로 들여온 것, 한자가 아니라 중국어 발음만을 들여온 것('백채白菜 -> 배추' 같은 예), 또 20세기에 대량으로 들어온 Made in Japan의 '일본계 한자어' 등으로 나뉘듯이요. 영어의 라틴계 단어 역시 '프랑스계 라틴단어'가 많지만 caupo->ceap같이 이렇게 직접 라틴어에서 들여온 단어도 꽤나 많은 것이죠.

이런 '직접적' 라틴 차용어로는 부엌을 뜻하는 키친(kitchen)이 있습니다. 속(俗)라틴어 (로마제국 쇠퇴 후 민중에게 널리 퍼져 변화한 라틴어)의 cocina에서 빌려온 것인데, 영단어에는 '요리'를 뜻하는 단어 퀴진(cuisine)도 있습니다. 이것은 불어의 퀴진에서 그대로 빌려온 것인데 이 불단어도 cocina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라틴어에서 직접 온 단어와, 불어를 한 단계 거쳐서 온 단어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죠.

관련없는 얘기가 길어졌습니다만 그저 '영어의 라틴계 차용어'가 매우 다양한 차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미리 말해두고 싶었습니다. 어쨌든 caupo로 돌아가보면 영어뿐만이 아니라 다른 게르만어도 이 단어를 빌려왔습니다. 독일어의 카우픈(kaufen)이 있는데 이 단어는 영어의 치프처럼 뜻이 요상하게 변하지 않고 '구매하다'라는 그나마 원의에 좀 가까운 의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애들은 게르만족 애들이 빌려쓴 단어를 걔네들한테서 또 빌려썼는데 러시아어의 쿠피치(купить)가 그것입니다. 뜻은 마찬가지로 '구매하다'.

덴마크가 어디 붙어있는 나라인지 아시나요? 독일 지도를 보면 위에 뿔처럼 나 있는 영토가 있는데 거기가 덴마크입니다. 덴마크어 역시 독일어, 영어와 사촌뻘인 게르만어죠. 그러다보니 독일어 kaufen과 마찬가지로 쾨베(købe)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사실 덴마크의 수도를 부르는 '코펜하겐'(Copenhagen)은 영어 발음이고 덴마크어로는 쾨벤하운(København). 여기서 하운(havn)은 영어의 헤이븐(haven: 피난항, 정박소)과 유사한 '항구'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러니 '쾨벤하운'은 사다 + 항구 = 무역항이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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