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모임'을 뜻하는 '분트'(Bund)라는 독단어는 한번쯤 직간접적으로 들어볼 일이 있었을 겁니다. 일단 독일 축구 리그명이 분데스리가(Bundesliga)죠. 또 독일연방공화국의 독어명이 뭐지요? 분데스레푸블리크 도이칠란트(Bundesrepublik Deutschland)입니다. 공화국(Republik)이 여럿이서 뭉치면(Bund) 연방이 되는 겁니다. 정 생소하다면 영어의 바인드(bind, 묶다)나 밴드(band, 묶임) 등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그런데 노어에도 분트(бунт)라는 단어가 있는데요, 중세독일어에서 폴란드어를 거쳐서 온 단어입니다. 재미있게도 '반동, 혁명'이라는 뜻입니다. 요즘에야 사람들이 모이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중세 폴란드 및 러시아 사람들은 사람이 여럿 모이면 반동분자들이 역적모의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나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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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 가면 칩사이드(Cheapside)라는 거리가 있습니다. 영국의 지명이 원래 좀 괴상하긴 하지만, 칩사이드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좀 웃긴 이름이죠. 치프(cheap)라니, 그 거리의 집은 집값이 싼 것일까?

현대영어에서 '저렴하다'를 의미하는 치프(cheap)는 '거래' 혹은 '시장'을 뜻하는 고대영어 ceap에서 왔습니다. '잘 한 거래', 즉 god ceap(good cheap)를 관용적으로 사용하다 보니 아예 ceap 자체가 저렴함을 뜻하게 된 것이죠. 즉 칩사이드는 싸구려 거리가 아닌, 아마도 장이 서는 시장거리였던 것이겠죠.

또 행상인을 뜻하는 챕맨(chapman)도 ceapmann에서 온 것입니다. 영국하고 호주에서 그냥 아무 남자나 부를 때 챕(chap)이라고 부르는 것도 챕맨의 축약형이구요.

그럼 ceap은 어디서 왔는지 살펴봅시다. 라틴어로 '소상인', '행상인', '여관주인'등을 의미하는 caupo에서 빌려온 것이라 합니다.

영어가 라틴어에서 엄청나게 많은 수의 단어를 빌려온 것은 맞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서 꾸준히 들어왔고 라틴어에서 직접 들여온 것, 불어/이태리어를 경유해서 들여온 것 등 같은 라틴계 단어라도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한국어의 한자 단어라도, 초기에 들어와서 한자 규범의식이 사라진 것('묵墨 -> 먹', '필筆 -> 붓' 같은 예)부터 시작해서, 중국에서 바로 들여온 것, 한자가 아니라 중국어 발음만을 들여온 것('백채白菜 -> 배추' 같은 예), 또 20세기에 대량으로 들어온 Made in Japan의 '일본계 한자어' 등으로 나뉘듯이요. 영어의 라틴계 단어 역시 '프랑스계 라틴단어'가 많지만 caupo->ceap같이 이렇게 직접 라틴어에서 들여온 단어도 꽤나 많은 것이죠.

이런 '직접적' 라틴 차용어로는 부엌을 뜻하는 키친(kitchen)이 있습니다. 속(俗)라틴어 (로마제국 쇠퇴 후 민중에게 널리 퍼져 변화한 라틴어)의 cocina에서 빌려온 것인데, 영단어에는 '요리'를 뜻하는 단어 퀴진(cuisine)도 있습니다. 이것은 불어의 퀴진에서 그대로 빌려온 것인데 이 불단어도 cocina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라틴어에서 직접 온 단어와, 불어를 한 단계 거쳐서 온 단어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죠.

관련없는 얘기가 길어졌습니다만 그저 '영어의 라틴계 차용어'가 매우 다양한 차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미리 말해두고 싶었습니다. 어쨌든 caupo로 돌아가보면 영어뿐만이 아니라 다른 게르만어도 이 단어를 빌려왔습니다. 독일어의 카우픈(kaufen)이 있는데 이 단어는 영어의 치프처럼 뜻이 요상하게 변하지 않고 '구매하다'라는 그나마 원의에 좀 가까운 의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애들은 게르만족 애들이 빌려쓴 단어를 걔네들한테서 또 빌려썼는데 러시아어의 쿠피치(купить)가 그것입니다. 뜻은 마찬가지로 '구매하다'.

덴마크가 어디 붙어있는 나라인지 아시나요? 독일 지도를 보면 위에 뿔처럼 나 있는 영토가 있는데 거기가 덴마크입니다. 덴마크어 역시 독일어, 영어와 사촌뻘인 게르만어죠. 그러다보니 독일어 kaufen과 마찬가지로 쾨베(købe)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사실 덴마크의 수도를 부르는 '코펜하겐'(Copenhagen)은 영어 발음이고 덴마크어로는 쾨벤하운(København). 여기서 하운(havn)은 영어의 헤이븐(haven: 피난항, 정박소)과 유사한 '항구'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러니 '쾨벤하운'은 사다 + 항구 = 무역항이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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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와 독일어는 같은 게르만어파에 속합니다. 라틴어, 러시아어, 산스크리트어 등이 영어의 '먼 친척'이라면 독일어, 네덜란드어, 덴마크어 등은 영어의 '가까운 친척'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뿌리가 같다는 것이 같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같이 자란 형제는 신체적으로 닮음은 물론이고 성격, 취향, 가치관 등도 닮을 가능성이 크겠지요. 하지만 형제 중 한 명이 다른 한 명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란다면? '기본적인 것', 그러니까 외모라던가 유전자 같은 것은 분명히 닮겠지만 그 외의 요소는 많이 변화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섬나라인 영국의 영어는 독일어를 비롯한 다른 게르만어와 상당히 이질적으로 변했습니다. 

영단어 덜(dull)을 알고 계시나요? 우둔한, 굼뜬, 지루한, 흐릿한 등의 뜻이죠. 고대영어에서는 'dol'로, '바보같은'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독일어로 톨(toll)은 '멋지다'를 의미합니다. 원래는 '미쳤다'의 뜻이죠. 바보같다 -> 미쳤다 같은 식으로 의미가 변화하지 않았나 합니다. 그러고는 미칠 정도로 멋지다는 뜻으로 쓰다보니 그런 감탄사가 되었다 봅니다.

같은 '바보같은'의 뜻이지만 시대를 거치면서 영어에서는 '지루한', 독어에서는 '멋진'의 뜻, 즉 정반대의 뜻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같은 뿌리의 언어라도 이렇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변화를 겪을 수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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