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를 뜻하는 그리스어 코스모스(κόσμος)는 한번쯤 들여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형수술의 영어명은 코스메틱 서저리(cosmetic surgery)지요. 코스모스와 코스메틱은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우주와 성형수술의 관계는 무엇일까?

사실 코스모스의 원뜻은 '질서'입니다. 피타고라스가 처음으로 이 단어를 '우주'의 의미로 사용했다고 전해져오는데요, 우주를 일종의 (수학적) 질서로 본 피타고라스의 우주관이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죠.

그런데 질서가 있는 것은 이 우주뿐만이 아닙니다. 무언가를 아름답게 하려면 질서정연하게 정리하고 꾸며야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코스모스는 여성의 미용이라는 뜻도 지니게 되었습니다. '코스메틱 서저리'는 사람의 혼돈스러운(?) 얼굴에 질서(?)를 가져다주는 수술인 것일까요?

그렇다면 질서의 반대말, 혼돈의 그리스어는 무엇일까요? 카오스(χάος)입니다. 어감이 멋지기도 해서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도 여기저기 써먹는 단어죠. 그런데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늘상 사용하고 있는, 카오스의 사촌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가스'(gas)입니다.


Halitum illud gas vocavi, non longe a Chao veterum.

옛사람들의 '카오스'에 가까운 이 연기를 나는 '가스'라고 불렀다.


이산화탄소를 발견한 네덜란드 화학자 얀밥티스트 판 헬몬트(Jan-Baptiste van Helmont, 1577-1644)의 말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질서정연한 '코스모스'와는 반대되는 혼돈을 '연기'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고, 판 헬몬트도 그런 것을 연상한 것이 아닐까요. 게다가 사실 '카오스'는 영어식 발음이고, 그리스어로는 '하오스' 비슷한 발음이 납니다. 그런데 네덜란드어의 g도 비슷한 발음이 난단 말이지요. 네덜란드인 축구감독 거스 히딩크의 Guss도 사실 '후스' 비슷하게 읽는다는 것은 아시겠지요. 그래서 이 사람도 g자를 쓰지 않았나 합니다. 물론 영어/불어를 통해 들여온 우리는 '가스'라고 부르고 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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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어로 토마토는 뭘까요? tomato? 포모도로(pomodoro)라고 합니다. 풀어쓰면 pomo d'oro인데요, pomo는 멜라(mela)와 마찬가지로 '사과'라는 뜻이고, 오로(oro)는 황금의 뜻입니다. 즉 토마토는 '황금사과'인 것이지요.

저번에 오렌지를 '중국 사과'라고 이름붙인 네덜란드인들이나, 토마토를 '포르투갈 감'이라 부른 한국인들의 기상천외한 센스에 대해서 다루어봤는데, 토마토를 '황금사과'라고 부른 이탈리아인들의 센스는 못 뛰어넘을 것 같습니다. 덜 익은 토마토의 불그스름한 노란빛을 보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금빛 사과라도 상상했던 것일까요?

한편 석류는 영어로 폼그레네이트(pomegranate)라고 하지요. 중세 라틴어로는 포뭄 그라나툼(pomum granatum)였는데, 포뭄은 아시겠지만 사과라는 뜻이고, 그라나툼은 '씨 많은' 혹은 '검붉은' 뜻이라고 합니다. 즉 석류는 '씨 많은 사과'라는 것입니다.

정작 프랑스에서는 '폼'은 쏙 빼먹고 그르나드(grenade)라고 석류를 부르고 있습니다. 한편 수류탄이라는 무기가 등장하면서 프랑스에서 누구인지는 몰라도 이걸 보고 석류와 비슷하게 생겨먹었다고 생각을 한 듯 합니다. 그래서 수류탄을 '석류'라고 불렀지요. '전방 석류!'인 겁니다. 그게 또 영어권으로 전해지면서 그레네이드(grenade)가 되었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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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어(말레이-인도네시아어)가 얼마나 다양한 어원의 언어인지 나타내기 위해 흔히 드는 예가 '책'을 뜻하는 마인어 단어입니다. 똑같은 책인데 범어에서 온 푸스타카(पुस्तक pustaka), 아랍어에서 온 키탑(كتاب kitab), 네덜란드어에서 온 부쿠(buku)라는 3가지 단어가 있지요. 물론 세 단어 각자 어감이 다르구요.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이기도 했기에 특히 네덜란드어에서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부쿠(buku)라고 하면 영어 북(book)을 콩글리시로 읽은 것 같지만 사실은 네덜란드어 부크(boek)에서 온 것입니다.

네덜란드어가 영향을 끼친 언어는 인니어뿐만이 아닙니다. 현대 벨기에가 불어/네덜란드어가 공용으로 쓰이는 국가인 것에서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네덜란드어와 불어는 항상 이웃 언어였고 이들이 서로 주고받은 영향은 의외로 큽니다.

네덜란드에는 지소사(指小詞)가 특히 많이 쓰입니다. 그러니까 부크에 접미사 -je를 붙여 boekje라고 하면 '작은 책'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게 꼭 크기가 작다는 의미가 아니더라도 뭔가 덜 중요한, '책 한 권 쯤'의 뜻이 되는 것이지요. 

중세 네덜란드어의 boek의 지소형은 boeckijn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불어로 건너가서 부캥(bouquin)이 되지요. 지금은 그냥 리브르(livre)와 차이없는 '책'이라는 뜻입니다만 옛날에는 '고서(古書)'라는 의미였나 봅니다. 네덜란드를 통해 희귀한 장서를 들여왔던 것일까요? 이와 연관된 부키니스트(bouquiniste)라는 '헌책상인'라는 단어도 있습니다.

인터넷 시대가 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책은 우리의 생활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중요한 물건인데도, 의외로 많은 언어에서 책이라는 단어가 외래어인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어의 '책(冊)'만 하더라도 중국에서 왔으니까요. 일본어의 혼(本)도 뿌리 본(本)의 독음이고, 일의 근본, 기초라는 뜻에서 그 기초, 규범을 가르쳐주는 책이라는 뜻으로 변화된 것이니, 궁극적으로는 중국에서 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책이라는 단어를 들여온 게 어찌보면 동아시아 언어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러시아어로 책은 크니가(книга)인데요, 어원은 불분명합니다. 고대 스칸디나비아어로 규범, 지식 등을 의미하는 kenning에서 온 것이라는 사람도 있고, 또 터키어 küin에서 온 것이라는 사람 있는데, 이 터키어 단어는 중국의 책 권(券)을 통해 온 것일수도 있다고 하네요. 현대 한어로는 '취앤'인데 상고발음은 '크니가'에 얼마나 가까웠는지 모르겠네요. 심지어는 券이 아니라 고전인 시경(詩經)의 발음의 변형이라는 설도 있는데...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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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어를 비롯한 슬라브어에서, 독일어를 비롯한 게르만어에서 단어를 많이 빌려왔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서로 이웃동네 사람들이니까 당연할 수 밖에요. 그런데 얘네들이 서로를 부르는 명칭을 들어보면 그다지 사이가 좋지만은 않았나 봅니다.

일단 슬라브족(Slav族)라는 표현을 보고 영어로 노예를 뜻하는 슬레이브(slave)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궁금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슬레이브'가 '슬라브'에서 온 것입니다. 10세기의 신성로마제국의 독일계 왕 오토 1세와 그 후계자들이 슬라브족들과 전쟁을 벌여 그들을 노예로 팔아먹었기에, 슬라브족의 라틴어 이름인 sclavus가 노예를 뜻하는 명사로 온 유럽에 퍼진 것이죠. 영어 슬레이브 뿐만이 아니라 불어 에스클라브(esclave), 독어 스클라베(Sklave) 등등...

그런데 슬라브족도 만만치 않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영어로 저먼(German)이죠? 불어로는 알망(allemand)이고요. 정작 독일인들 자신은 도이치(Deutsch)라고 자칭하는데 말이죠. 저먼이야 '게르만'족의 영어식 발음이고, 알망은 게르만 부족 중 하나인 알레마니족의 이름이 독일인들 전체의 이름으로 굳어진 경우입니다.

그런데 러시아어에서는 녜메츠(немец)라고 부릅니다. 대부분의 슬라브어에서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건 어떤 특정한 부족 이름이 아니라 일종의 의성어입니다. 마치 말 제대로 못하는 벙어리나 아기가 네네메메거리는 소리에서 따온 것이죠. 즉 원래는 러시아어를 잘 못하는 외국인들을 총칭하는 표현이었는데 이게 독일인들의 이름으로 굳어진 경우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그리스어를 못하는 이방인의 언어를 흉내내 '바르바로이'라고 부른 것이 '게르만인'의 호칭이 된 경우도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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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ve Canem (개조심)

카나리아는 그 모습이 고와서 애완용으로 기르기도 하는 새입니다. 아프리카 서쪽의 스페인령 Insula Canaria라고 하는 섬의 새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는데요, insula는 라틴어로 섬이라는 뜻이고, canaria는 카나리아... 라는 뜻이 아니라 '개(犬)의' 라는 뜻입니다. 그 섬에 사는 개들이 유독 덩치가 컸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지어줬다고 하네요. 즉 카나리아라는 이름은 어떻게 보면 '개새'가 되는 것이죠.

라틴어로 개를 뜻하는 canis는 꽤나 유명한 단어입니다. 일단 폼페이 유적의 유명한 개조심 글귀 cave canem(개 조심하시오)가 있지요. 영어로 캐나인(canine) 하면 개와 관련된 것을 뜻하기도 하고요. 

한여름인 지금 폭염에 시달리시는 분들도 많을 듯 한데요, 불어로 폭염은 카니퀼(canicule)입니다. 라틴어로 카니쿨라(canicula)라고 하면 작은 개를 의미하는데, 별 시리우스의 이칭이기도 합니다. 7월 24일부터 8월 24일까지는 시리우스가 태양과 같은 시기에 뜨고 지기 때문에 고대인들은 이 별과 폭염이 뭔가 관련있나보다 생각해서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지요. 한국에서 한창 더울 때면 개를 잡아먹는 것도 혹시 이것과 관련이 있을 지도...? 는 농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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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모임'을 뜻하는 '분트'(Bund)라는 독단어는 한번쯤 직간접적으로 들어볼 일이 있었을 겁니다. 일단 독일 축구 리그명이 분데스리가(Bundesliga)죠. 또 독일연방공화국의 독어명이 뭐지요? 분데스레푸블리크 도이칠란트(Bundesrepublik Deutschland)입니다. 공화국(Republik)이 여럿이서 뭉치면(Bund) 연방이 되는 겁니다. 정 생소하다면 영어의 바인드(bind, 묶다)나 밴드(band, 묶임) 등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그런데 노어에도 분트(бунт)라는 단어가 있는데요, 중세독일어에서 폴란드어를 거쳐서 온 단어입니다. 재미있게도 '반동, 혁명'이라는 뜻입니다. 요즘에야 사람들이 모이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중세 폴란드 및 러시아 사람들은 사람이 여럿 모이면 반동분자들이 역적모의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나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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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 가면 칩사이드(Cheapside)라는 거리가 있습니다. 영국의 지명이 원래 좀 괴상하긴 하지만, 칩사이드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좀 웃긴 이름이죠. 치프(cheap)라니, 그 거리의 집은 집값이 싼 것일까?

현대영어에서 '저렴하다'를 의미하는 치프(cheap)는 '거래' 혹은 '시장'을 뜻하는 고대영어 ceap에서 왔습니다. '잘 한 거래', 즉 god ceap(good cheap)를 관용적으로 사용하다 보니 아예 ceap 자체가 저렴함을 뜻하게 된 것이죠. 즉 칩사이드는 싸구려 거리가 아닌, 아마도 장이 서는 시장거리였던 것이겠죠.

또 행상인을 뜻하는 챕맨(chapman)도 ceapmann에서 온 것입니다. 영국하고 호주에서 그냥 아무 남자나 부를 때 챕(chap)이라고 부르는 것도 챕맨의 축약형이구요.

그럼 ceap은 어디서 왔는지 살펴봅시다. 라틴어로 '소상인', '행상인', '여관주인'등을 의미하는 caupo에서 빌려온 것이라 합니다.

영어가 라틴어에서 엄청나게 많은 수의 단어를 빌려온 것은 맞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서 꾸준히 들어왔고 라틴어에서 직접 들여온 것, 불어/이태리어를 경유해서 들여온 것 등 같은 라틴계 단어라도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한국어의 한자 단어라도, 초기에 들어와서 한자 규범의식이 사라진 것('묵墨 -> 먹', '필筆 -> 붓' 같은 예)부터 시작해서, 중국에서 바로 들여온 것, 한자가 아니라 중국어 발음만을 들여온 것('백채白菜 -> 배추' 같은 예), 또 20세기에 대량으로 들어온 Made in Japan의 '일본계 한자어' 등으로 나뉘듯이요. 영어의 라틴계 단어 역시 '프랑스계 라틴단어'가 많지만 caupo->ceap같이 이렇게 직접 라틴어에서 들여온 단어도 꽤나 많은 것이죠.

이런 '직접적' 라틴 차용어로는 부엌을 뜻하는 키친(kitchen)이 있습니다. 속(俗)라틴어 (로마제국 쇠퇴 후 민중에게 널리 퍼져 변화한 라틴어)의 cocina에서 빌려온 것인데, 영단어에는 '요리'를 뜻하는 단어 퀴진(cuisine)도 있습니다. 이것은 불어의 퀴진에서 그대로 빌려온 것인데 이 불단어도 cocina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라틴어에서 직접 온 단어와, 불어를 한 단계 거쳐서 온 단어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죠.

관련없는 얘기가 길어졌습니다만 그저 '영어의 라틴계 차용어'가 매우 다양한 차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미리 말해두고 싶었습니다. 어쨌든 caupo로 돌아가보면 영어뿐만이 아니라 다른 게르만어도 이 단어를 빌려왔습니다. 독일어의 카우픈(kaufen)이 있는데 이 단어는 영어의 치프처럼 뜻이 요상하게 변하지 않고 '구매하다'라는 그나마 원의에 좀 가까운 의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애들은 게르만족 애들이 빌려쓴 단어를 걔네들한테서 또 빌려썼는데 러시아어의 쿠피치(купить)가 그것입니다. 뜻은 마찬가지로 '구매하다'.

덴마크가 어디 붙어있는 나라인지 아시나요? 독일 지도를 보면 위에 뿔처럼 나 있는 영토가 있는데 거기가 덴마크입니다. 덴마크어 역시 독일어, 영어와 사촌뻘인 게르만어죠. 그러다보니 독일어 kaufen과 마찬가지로 쾨베(købe)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사실 덴마크의 수도를 부르는 '코펜하겐'(Copenhagen)은 영어 발음이고 덴마크어로는 쾨벤하운(København). 여기서 하운(havn)은 영어의 헤이븐(haven: 피난항, 정박소)과 유사한 '항구'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러니 '쾨벤하운'은 사다 + 항구 = 무역항이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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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와 독일어는 같은 게르만어파에 속합니다. 라틴어, 러시아어, 산스크리트어 등이 영어의 '먼 친척'이라면 독일어, 네덜란드어, 덴마크어 등은 영어의 '가까운 친척'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뿌리가 같다는 것이 같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같이 자란 형제는 신체적으로 닮음은 물론이고 성격, 취향, 가치관 등도 닮을 가능성이 크겠지요. 하지만 형제 중 한 명이 다른 한 명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란다면? '기본적인 것', 그러니까 외모라던가 유전자 같은 것은 분명히 닮겠지만 그 외의 요소는 많이 변화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섬나라인 영국의 영어는 독일어를 비롯한 다른 게르만어와 상당히 이질적으로 변했습니다. 

영단어 덜(dull)을 알고 계시나요? 우둔한, 굼뜬, 지루한, 흐릿한 등의 뜻이죠. 고대영어에서는 'dol'로, '바보같은'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독일어로 톨(toll)은 '멋지다'를 의미합니다. 원래는 '미쳤다'의 뜻이죠. 바보같다 -> 미쳤다 같은 식으로 의미가 변화하지 않았나 합니다. 그러고는 미칠 정도로 멋지다는 뜻으로 쓰다보니 그런 감탄사가 되었다 봅니다.

같은 '바보같은'의 뜻이지만 시대를 거치면서 영어에서는 '지루한', 독어에서는 '멋진'의 뜻, 즉 정반대의 뜻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같은 뿌리의 언어라도 이렇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변화를 겪을 수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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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 크라나흐의 <타락 Sündenfall>. 사실 성경에 선악과가 사과란 말은 없습니다. 유럽인들에게 익숙한 과일이다보니 사과의 이미지가 생긴 것이겠지요.

영어로 복숭아는 피치(peach)라고 합니다. 어원을 거슬러올라가보면 라틴어의 페르시쿰 말룸(persicum malum), 즉 '페르시아 사과'가 되겠습니다. (사실 말룸(malum)은 사과뿐만 아니라 연한 과육에 단단한 핵의 모든 과일에 쓰일 수 있습니다.) 복숭아 자체는 중국이 원산이지만 페르시아를 거쳐서 들어왔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라틴어 학명도 prunus persica, 즉 페르시아 프룬(서양자두의 일종)입니다.

사과는 영어로 애플(apple)이지요. 영어와 친척 관계인 네덜란드어에서는 아플(appel)입니다. 발음도 매우 비슷해요.  그런데 오렌지는 네덜란드어로 뭐일까요? 네덜란드에서는 오렌지를 달라고 해도 어린쥐를 달라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오렌지는 시나스아플(sinaasappel), 즉 '중국 사과'이기 때문이지요. 우리야 오렌지를 '서양 귤'쯤으로 알고있지만 사실 이거, 중국이 원산이고 한자로는 등(橙)이라 씁니다.  중국에서 16세기에 포르투갈 사람들이 들여왔고, 라틴어 학명은 Citrus sinensis, 즉 '중국 레몬'입니다. 또 주황색과 비슷한 색인 등색(橙色)이 있고요. 등자나무라는 나무이름도 한번쯤 들어보셨을 듯한데 아무래도 여기서 열리는 등자는 맛이 시고 쓰다고 하니 우리가 아는 오렌지와는 살짝 다른 듯하네요. 참고로 한국의 걸그룹 <오렌지 카라멜>의 중화권 이름이 등자초당(橙子焦糖)이라고 합니다. 또 일본의 슈팅게임 동방프로젝트에 첸(橙)이라는 캐릭터가 있지요.

어쨌든 네덜란드인들이 이런 무역은 꽉 잡고 있었던지라 네덜란드식 이름도 꽤 퍼졌는데요, 지금 표준 네덜란드어로는 시나스아플이지만 옛날에는 아플신(appelsien)이라고 했습니다. 독일 북부에서는 지금도 압펠시네(Apfelsine)라고 부르는 곳이 있고요, 러시아까지 퍼져서 노어로는 아폘신(апельсин)입니다. 러시아 왕족들이 별미로 즐겼다고 하네요. 흥미롭게도 푸에르토리코의 스페인어로는 치나(china)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네덜란드가 아닌 포르투갈을 통해 접한 나라들도 있나 봅니다. 불가리아어에서는 오렌지를 포르토칼 (портокал)이라 하고, 그리스어로는 포르토칼리(πορτοκαλι), 페르시아어와 아랍어에서는 부르투칼(برتقال)이라 한답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오렌지를 사과에 비교한 것을 보면 네덜란드 사람들의 미각을 의심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한국도 토마토를 남만시(南蠻枾), 즉 포르투갈 감으로 부른 걸 보면 우리도 남말할 처지가 아니겠죠.

헌데 네덜란드 사람들이 사과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오렌지뿐만이 아닙니다. 남미에서 들여온 감자는 아르다플(aardappel)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아르드(aarde)는 영어의 어스(earth)와 마찬가지로 흙, 땅을 뜻합니다. 즉 땅에서 나는 사과... 라는 것이죠. 마냥 황당한 작명으로만 볼 것이 아닌게, 실제로 코를 막고 감자를 날것으로 베어물면 사과와 거의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독일의 일부 지방과 오스트리아, 스위스에서도 에르답펠(Erdapfel)이라고도 부릅니다. 불어도 여기에서 따와서 폼 드 테르(pomme de terre)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테르'는 라틴어 '테라'(terra)에서도 볼 수 있듯 땅이라는 뜻이죠. 

외래 과일에 이것저것 사과라는 이름을 붙인 걸 보면 사과가 유럽인들에게는 꽤나 대표적인 과실이었던가 봅니다. 성경의 선악과가 사과로 그려진 것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을지도요.

한편 동아시아의 '사과'는 어떨까요. 현대한국어에서 사과(沙果)라 하는 것은 범어의 가차자로, 원래는 사과의 일부 품종을 가리키는 것이었다고 하고,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는 원래 '능금'을 썼다고 합니다. 요즘은 한의학에서나 들을 수 있는 명칭인 '능금'이지만 원래는 임금(林檎)이었다고 합니다. 능금나무 금(檎)을 쓰지요. 중국 명대의 <본초강목>의 30권을 보면 이런 말이 있는데요

林檎一名来禽, 言味甘熟則来禽也。

임금일명래금, 언미감숙즉래금야.

임금이라는 이름은 새 금(禽)에서 왔으니, 그 맛이 달고 좋아 새가 찾아왔다 하였음이라.

즉 능금나무의 열매를 먹으러 禽(맹금, 가금 할 때 그 '금')이 많이 찾아와서 임금이라 붙였다는 말인데... 솔직히 민간어원 같습니다만 어쨌든 재미있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 '능금'이란 말은 사장되어가고 있습니다만 일본에서는 '링고'라고 하지요. 요즘이야 대개 히라가나 아니면 가타가나로 쓰지만 어쨌거나 林檎의 독음이니 한국의 능금과 뿌리가 같음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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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라(मकर)의 입에서 솟아나오는 나가(नाग) 떼를 표현한 태국의 조각상. 주제는 인도 신화인데 마카라는 중국풍 용으로 표현된 게 흥미롭죠.

뱀과 달팽이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보기에는 전혀 연관점이 없을 것 같은 동물들이죠. 하지만 생각해보면 둘 다 발 없이 기어다닌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네 발로 성큼성큼 걸어다니는 동물들과 달리 움직이는 것도 왠지 소리없이 스스슥 스멀스멀, 뭔가 기분나쁜 데가 있죠.

이렇게 얌체같이 몰래몰래 기어들어오는 걸 영어로는 뭐라고 할까요? 스니크(sneak)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좋은 느낌은 아니기에 형용사인 스니키(sneaky)에는 얌체같은, 비열한 등의 뜻도 있죠. 운동화도 스니커즈(sneakers)라고 하지 않습니까? 뚜벅뚜벅 소리나는 구두와 달리 걸을 때 소리가 안 나기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스니크라는 단어 어딘가 낯익지 않나요? 모음만 조금 바꿔보면 스네이크(snake)가 됩니다. 사실 이 두 단어는 고대영어 snaca, 인도유럽어족 어근인 *(s)nēg-o-에서 온 것입니다. 고대인들이 뱀이 기어다니는 걸 보고 '저 기어다니는 놈'하고 이름을 붙인 것일까요.

그런데 독일어 슈넥케(Schnecke)는 무슨 뜻이냐면 바로 달팽이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척 보기에도 스네이크와 닮았지만 고대 고지 독일어 snecco에서 온 것으로, 고대영어 snaca와 가깝습니다. 

그런데 독일어로 민달팽이는 슈네겔(Schnegel)입니다. 영어로 달팽이는 스네일(Snail)인데 이건 고대영어 snægl에서 온 것이지요. snægl은 snaga의 지소사(指小詞)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소사가 뭐냐면 무언가에게 좀더 작은 느낌을 주기 위해 변형된 단어를 일컫습니다. dog를 doggy라고 부른다던가요. 즉 뱀은 '기어다니는 놈', 달팽이는 '작은 기어다니는 놈'이었던 것인지도 모르죠.

영어에서 snægl -> snail처럼 -ægl이 -ail로 변하는 예는 nægl -> nail(못, 손발톱)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독일어는 이러한 음운변화를 겪지 않은 것인지, 못/손발톱은 나겔(Nagel)이죠. 원래 발톱, 발굽 등을 뜻하는 인구어 어근 *onughos에서 온 것인데 범어(산스크리트어)로 손발톱이 나카(nhaka नख)입니다. 흥미롭게도 러시아어에서 발, 다리를 뜻하는 단어가 나가(нога)인데요, '발톱'의 뜻에서 발, 다리로 의미가 환유된 셈입니다.

뱀 얘기로 돌아와서, *(s)nēg-o-는 범어에서도 존재하고 있는데요, 나가(nāga नाग)가 뱀이라는 뜻입니다. 인도신화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뱀신 '나가'의 이름이 익숙하실 텐데요 사실 뱀신이라고 해도 이름은 그냥 '뱀'일 뿐입니다. 뱀들의 왕 나가라자(nāgaraja नागराजा)가 한역된 것이 바로 용왕(龍王)입니다. raja는 왕이라는 뜻이고, 영어의 통치(reign), 왕족의(royal) 등에서 비슷한 단어를 찾아볼 수 있죠. 또 불교의 용수(龍樹 )의 범어명 역시 나가라주나(nāgārajuna नागार्जुन)입니다.

그런데 코브라속(屬)의 학명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나자(naja)입니다. 이것은 포르투갈어로 '코브라'를 뜻합니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인도에 가서 인도 특유의 코브라를 보고 인도 사람들이 뱀을 부르는 일반명사 '나가'를, 코브라를 뜻하는 명사로 받아들여와 '나자'로 변한 것이죠. 그런데 웃긴 것은 코브라(cobra)역시 포르투갈어이고 그냥 '뱀'을 뜻합니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코브라 데 카펠루(cobra de capello), 즉 두건 쓴 뱀이라고 부른 것을(코브라의 목덜미가 두건처럼 생겼으니까) 영국인들을 비롯한 다른 유럽 사람들이 뒤는 쏙 빼먹고 앞의 '코브라'만 들여와서 인도 뱀을 부르는 명칭으로 써먹은 것입니다. 일반명사의 외래어가 들어오면서 의미가 축소, 제한되는 전형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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