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와 독일어는 같은 게르만어파에 속합니다. 라틴어, 러시아어, 산스크리트어 등이 영어의 '먼 친척'이라면 독일어, 네덜란드어, 덴마크어 등은 영어의 '가까운 친척'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뿌리가 같다는 것이 같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같이 자란 형제는 신체적으로 닮음은 물론이고 성격, 취향, 가치관 등도 닮을 가능성이 크겠지요. 하지만 형제 중 한 명이 다른 한 명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란다면? '기본적인 것', 그러니까 외모라던가 유전자 같은 것은 분명히 닮겠지만 그 외의 요소는 많이 변화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섬나라인 영국의 영어는 독일어를 비롯한 다른 게르만어와 상당히 이질적으로 변했습니다. 

영단어 덜(dull)을 알고 계시나요? 우둔한, 굼뜬, 지루한, 흐릿한 등의 뜻이죠. 고대영어에서는 'dol'로, '바보같은'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독일어로 톨(toll)은 '멋지다'를 의미합니다. 원래는 '미쳤다'의 뜻이죠. 바보같다 -> 미쳤다 같은 식으로 의미가 변화하지 않았나 합니다. 그러고는 미칠 정도로 멋지다는 뜻으로 쓰다보니 그런 감탄사가 되었다 봅니다.

같은 '바보같은'의 뜻이지만 시대를 거치면서 영어에서는 '지루한', 독어에서는 '멋진'의 뜻, 즉 정반대의 뜻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같은 뿌리의 언어라도 이렇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변화를 겪을 수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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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 크라나흐의 <타락 Sündenfall>. 사실 성경에 선악과가 사과란 말은 없습니다. 유럽인들에게 익숙한 과일이다보니 사과의 이미지가 생긴 것이겠지요.

영어로 복숭아는 피치(peach)라고 합니다. 어원을 거슬러올라가보면 라틴어의 페르시쿰 말룸(persicum malum), 즉 '페르시아 사과'가 되겠습니다. (사실 말룸(malum)은 사과뿐만 아니라 연한 과육에 단단한 핵의 모든 과일에 쓰일 수 있습니다.) 복숭아 자체는 중국이 원산이지만 페르시아를 거쳐서 들어왔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라틴어 학명도 prunus persica, 즉 페르시아 프룬(서양자두의 일종)입니다.

사과는 영어로 애플(apple)이지요. 영어와 친척 관계인 네덜란드어에서는 아플(appel)입니다. 발음도 매우 비슷해요.  그런데 오렌지는 네덜란드어로 뭐일까요? 네덜란드에서는 오렌지를 달라고 해도 어린쥐를 달라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오렌지는 시나스아플(sinaasappel), 즉 '중국 사과'이기 때문이지요. 우리야 오렌지를 '서양 귤'쯤으로 알고있지만 사실 이거, 중국이 원산이고 한자로는 등(橙)이라 씁니다.  중국에서 16세기에 포르투갈 사람들이 들여왔고, 라틴어 학명은 Citrus sinensis, 즉 '중국 레몬'입니다. 또 주황색과 비슷한 색인 등색(橙色)이 있고요. 등자나무라는 나무이름도 한번쯤 들어보셨을 듯한데 아무래도 여기서 열리는 등자는 맛이 시고 쓰다고 하니 우리가 아는 오렌지와는 살짝 다른 듯하네요. 참고로 한국의 걸그룹 <오렌지 카라멜>의 중화권 이름이 등자초당(橙子焦糖)이라고 합니다. 또 일본의 슈팅게임 동방프로젝트에 첸(橙)이라는 캐릭터가 있지요.

어쨌든 네덜란드인들이 이런 무역은 꽉 잡고 있었던지라 네덜란드식 이름도 꽤 퍼졌는데요, 지금 표준 네덜란드어로는 시나스아플이지만 옛날에는 아플신(appelsien)이라고 했습니다. 독일 북부에서는 지금도 압펠시네(Apfelsine)라고 부르는 곳이 있고요, 러시아까지 퍼져서 노어로는 아폘신(апельсин)입니다. 러시아 왕족들이 별미로 즐겼다고 하네요. 흥미롭게도 푸에르토리코의 스페인어로는 치나(china)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네덜란드가 아닌 포르투갈을 통해 접한 나라들도 있나 봅니다. 불가리아어에서는 오렌지를 포르토칼 (портокал)이라 하고, 그리스어로는 포르토칼리(πορτοκαλι), 페르시아어와 아랍어에서는 부르투칼(برتقال)이라 한답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오렌지를 사과에 비교한 것을 보면 네덜란드 사람들의 미각을 의심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한국도 토마토를 남만시(南蠻枾), 즉 포르투갈 감으로 부른 걸 보면 우리도 남말할 처지가 아니겠죠.

헌데 네덜란드 사람들이 사과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오렌지뿐만이 아닙니다. 남미에서 들여온 감자는 아르다플(aardappel)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아르드(aarde)는 영어의 어스(earth)와 마찬가지로 흙, 땅을 뜻합니다. 즉 땅에서 나는 사과... 라는 것이죠. 마냥 황당한 작명으로만 볼 것이 아닌게, 실제로 코를 막고 감자를 날것으로 베어물면 사과와 거의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독일의 일부 지방과 오스트리아, 스위스에서도 에르답펠(Erdapfel)이라고도 부릅니다. 불어도 여기에서 따와서 폼 드 테르(pomme de terre)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테르'는 라틴어 '테라'(terra)에서도 볼 수 있듯 땅이라는 뜻이죠. 

외래 과일에 이것저것 사과라는 이름을 붙인 걸 보면 사과가 유럽인들에게는 꽤나 대표적인 과실이었던가 봅니다. 성경의 선악과가 사과로 그려진 것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을지도요.

한편 동아시아의 '사과'는 어떨까요. 현대한국어에서 사과(沙果)라 하는 것은 범어의 가차자로, 원래는 사과의 일부 품종을 가리키는 것이었다고 하고,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는 원래 '능금'을 썼다고 합니다. 요즘은 한의학에서나 들을 수 있는 명칭인 '능금'이지만 원래는 임금(林檎)이었다고 합니다. 능금나무 금(檎)을 쓰지요. 중국 명대의 <본초강목>의 30권을 보면 이런 말이 있는데요

林檎一名来禽, 言味甘熟則来禽也。

임금일명래금, 언미감숙즉래금야.

임금이라는 이름은 새 금(禽)에서 왔으니, 그 맛이 달고 좋아 새가 찾아왔다 하였음이라.

즉 능금나무의 열매를 먹으러 禽(맹금, 가금 할 때 그 '금')이 많이 찾아와서 임금이라 붙였다는 말인데... 솔직히 민간어원 같습니다만 어쨌든 재미있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 '능금'이란 말은 사장되어가고 있습니다만 일본에서는 '링고'라고 하지요. 요즘이야 대개 히라가나 아니면 가타가나로 쓰지만 어쨌거나 林檎의 독음이니 한국의 능금과 뿌리가 같음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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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라(मकर)의 입에서 솟아나오는 나가(नाग) 떼를 표현한 태국의 조각상. 주제는 인도 신화인데 마카라는 중국풍 용으로 표현된 게 흥미롭죠.

뱀과 달팽이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보기에는 전혀 연관점이 없을 것 같은 동물들이죠. 하지만 생각해보면 둘 다 발 없이 기어다닌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네 발로 성큼성큼 걸어다니는 동물들과 달리 움직이는 것도 왠지 소리없이 스스슥 스멀스멀, 뭔가 기분나쁜 데가 있죠.

이렇게 얌체같이 몰래몰래 기어들어오는 걸 영어로는 뭐라고 할까요? 스니크(sneak)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좋은 느낌은 아니기에 형용사인 스니키(sneaky)에는 얌체같은, 비열한 등의 뜻도 있죠. 운동화도 스니커즈(sneakers)라고 하지 않습니까? 뚜벅뚜벅 소리나는 구두와 달리 걸을 때 소리가 안 나기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스니크라는 단어 어딘가 낯익지 않나요? 모음만 조금 바꿔보면 스네이크(snake)가 됩니다. 사실 이 두 단어는 고대영어 snaca, 인도유럽어족 어근인 *(s)nēg-o-에서 온 것입니다. 고대인들이 뱀이 기어다니는 걸 보고 '저 기어다니는 놈'하고 이름을 붙인 것일까요.

그런데 독일어 슈넥케(Schnecke)는 무슨 뜻이냐면 바로 달팽이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척 보기에도 스네이크와 닮았지만 고대 고지 독일어 snecco에서 온 것으로, 고대영어 snaca와 가깝습니다. 

그런데 독일어로 민달팽이는 슈네겔(Schnegel)입니다. 영어로 달팽이는 스네일(Snail)인데 이건 고대영어 snægl에서 온 것이지요. snægl은 snaga의 지소사(指小詞)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소사가 뭐냐면 무언가에게 좀더 작은 느낌을 주기 위해 변형된 단어를 일컫습니다. dog를 doggy라고 부른다던가요. 즉 뱀은 '기어다니는 놈', 달팽이는 '작은 기어다니는 놈'이었던 것인지도 모르죠.

영어에서 snægl -> snail처럼 -ægl이 -ail로 변하는 예는 nægl -> nail(못, 손발톱)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독일어는 이러한 음운변화를 겪지 않은 것인지, 못/손발톱은 나겔(Nagel)이죠. 원래 발톱, 발굽 등을 뜻하는 인구어 어근 *onughos에서 온 것인데 범어(산스크리트어)로 손발톱이 나카(nhaka नख)입니다. 흥미롭게도 러시아어에서 발, 다리를 뜻하는 단어가 나가(нога)인데요, '발톱'의 뜻에서 발, 다리로 의미가 환유된 셈입니다.

뱀 얘기로 돌아와서, *(s)nēg-o-는 범어에서도 존재하고 있는데요, 나가(nāga नाग)가 뱀이라는 뜻입니다. 인도신화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뱀신 '나가'의 이름이 익숙하실 텐데요 사실 뱀신이라고 해도 이름은 그냥 '뱀'일 뿐입니다. 뱀들의 왕 나가라자(nāgaraja नागराजा)가 한역된 것이 바로 용왕(龍王)입니다. raja는 왕이라는 뜻이고, 영어의 통치(reign), 왕족의(royal) 등에서 비슷한 단어를 찾아볼 수 있죠. 또 불교의 용수(龍樹 )의 범어명 역시 나가라주나(nāgārajuna नागार्जुन)입니다.

그런데 코브라속(屬)의 학명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나자(naja)입니다. 이것은 포르투갈어로 '코브라'를 뜻합니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인도에 가서 인도 특유의 코브라를 보고 인도 사람들이 뱀을 부르는 일반명사 '나가'를, 코브라를 뜻하는 명사로 받아들여와 '나자'로 변한 것이죠. 그런데 웃긴 것은 코브라(cobra)역시 포르투갈어이고 그냥 '뱀'을 뜻합니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코브라 데 카펠루(cobra de capello), 즉 두건 쓴 뱀이라고 부른 것을(코브라의 목덜미가 두건처럼 생겼으니까) 영국인들을 비롯한 다른 유럽 사람들이 뒤는 쏙 빼먹고 앞의 '코브라'만 들여와서 인도 뱀을 부르는 명칭으로 써먹은 것입니다. 일반명사의 외래어가 들어오면서 의미가 축소, 제한되는 전형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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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퍼스트 레이디'로 불린 미국의 돌리 매디슨(Dolley Madison)


퍼스트 레이디(First Lady), 우리말로는 영부인(令夫人)이라고도 하지요. (정확히는 영부인은 남의 부인에 대한 존칭입니다만 요즘에는 거의 대통령의 부인의 호칭으로 통일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퍼스트 레이디라는 말이 처음 쓰인 건 1849년 미국에서입니다. 대통령이라는 직위가 처음 생긴 것도 미국이니 이상한 일이 아니지요.

영단어 프린스(prince)는 왕자 혹은 군주를 의미합니다. 불어 프랭스(prince)에서, 나아가 라틴어 프린켑스(princeps)에서 온 것이지요. 이 프린켑스를 뜯어보자면 라틴어로 처음을 뜻하는 프리무스(primus)와, 잡다를 뜻하는 카페레(capere)의 합성입니다. 즉 '처음으로 잡는 자' 비스므레한 느낌이겠죠.

이 '프리무스'는 라틴어의 후예인 로망스어군에서 여전히 쓰이고 있습니다. 일단 불어로는 '프르미에'(premier)입니다. 캐나다 퀘벡 작곡가 앙드레 가뇽의 <첫날처럼>(Comme Au Premier Jour)은 유명한 곡이지요. 그런데 불단어는 멋지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들여온 영국 사람들답게 이 프르미에는 영어로 건너가 영어 발음으로 '프리미어'가 되어서 뭔가 고상한 느낌으로 써먹히고 있습니다. 일단 영화 초연도 '프리미어'라고 하고, 잉글랜드의 '프리미어리그'도 있고요. 하여간 이렇게 불어의 일상적인 어휘가 영어에서는 고급적인 느낌을 띠게 되는 경우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불어에서는 단순히 '크다'의 뜻인 그랑(grand)이 영어에서는 단순히 클 뿐만이 아니라 어딘가 거창한 느낌을 띠는 '그랜드'(grand)가 되는 것이지요. 불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서 간혹 들을 수 있는 불부심(?)입니다.

불어뿐만 아니라 다른 로망스어에서도 쓰이고 있습니다. 이태리어에서는 프리마(prima)라고 하지요. 오페라의 주역 여배우은 프리마돈나(Prima Donna), 즉 첫번째 여인(donna)입니다. 독일어에서도 라틴어에서 직접 따온 프리마(prima)라는 감탄사가 있습니다. prima! 하면 멋진데! 라는 뜻이지요.

물론 독일어도 라틴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긴 하지만 영어만큼은 아니라서 게르만계 어휘가 훨씬 더 많이 쓰입니다. 이런 독일어에서 후작을 일컫는 단어가 바로 퓌르스트(Fürst)입니다. 이것이 영단어 '퍼스트'와 관련있음은 말 안해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라틴어를 나름대로 번역한 것이지요. 그러나 현대 독어에서 '퓌르스트'라는 말에는 '처음'이란 뜻이 없고 대신 에르스트(erst)를 씁니다. 퓌르스트의 '후작'의 뜻이 '처음'의 뜻을 밀어낸 것일까요? 에르스트와 접점이 있는 영단어를 굳이 찾자면 '이른'을 뜻하는 얼리(early)가 있겠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최고급인 얼리에스트(earliest)가 되겠죠.

퍼스트 레이디라는 말 자체는 미국 12대 대통령인 재커리 테일러가 아내 매디슨의 장례식에서 처음 이용한 것이니 어원을 따지자면 그 양반 머릿속이겠지만 굳이 퍼스트라는 수식어를 쓴 것은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봐서 생각해봐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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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 선사(禪士) 하쿠인 에카쿠(白隠慧鶴)의 일원상(一円相)


Three, two, one, zero... 영어로 숫자를 세다보면 왠지 0을 나타내는 제로(zero)만 어딘가 형태가 좀 특별나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사실 영어에서 -o로 끝나는 단어가 그다지 많지 않지요. 이것은 다른 숫자는 영어의 고유 게르만 어휘에 속하는 반면 zero는 17세기라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탈리아어에서 들여왔기에 그런 것입니다. 이탈리아어의 남성명사는 거의 전부 다 -o 아니면 -e로 끝납니다. 젤라토(gelato), 카푸치노(cappucino), 에스프레소(espresso), 마니페스토(manifesto), 마니또(manito) 등등...
수학에는 젬병인 제가 수학 얘기를 하게 되는 것 같아서 좀 어색하군요. 어쨌든 영(0)이라는 숫자는 인도에서 발생해 유럽으로 건너온 것이라는 것은 한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정확히는 아랍문화를 거쳐서 들어왔지요. 13세기에 레오나르도 리보나치(Lenoardo Fibonacci)가 쓴 Liber Abaci에 0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Novem figure indorum he sunt 987654321. Cum his itaque novem figuris, et cum hoc signo 0 quod arabice zephirum appelatur.
아홉 가지의 인도 문자는 다음과 같다: 987654321. 그리고 이 아홉 문자에 더해, 아랍인들이 제피룸(zephirum)라고 부르는 0이라는 기호도 있다.
발번역입니다. 죄송.

0이라는 기호를 지칭할 자국어가 딱히 없었기에 '아랍애들은 이렇게 부른다더라'고 한 것이죠.
기원이 되는 산스크리트어는 슌야(शून्य)입니다. 지금도 힌디어에서는 0을 슌야라고 합니다. 참고로 불교에서 공(空)이라고 하는 개념이 이것의 명사형 슌야타(शून्यता)의 번역입니다. (라틴어의 -tas, 독일어의 -teit, 영어의 -ty와 비슷한 명사형 어미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아랍인들이 받아들이면서 비슷한 개념인 시프르(صفر)로 번역했고 이것이 이탈리아에서 라틴어로 옮겨지면서 zefirum이 되고, 라틴어에서 이탈리아어화되면서 체피로(zefiro), 나아가 체로(zero)가 된 듯합니다. 흥미롭게도, 이슬람권인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에서도 말레이어로 0을 시파르(sifar)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불어에서도 0은 zéro라고 하지요. 영어가 불어에서 엄청나게 많은 단어를 받아들였지만, 불어 역시 이태리어에서 만만치 않은 어휘와 문법요소를 수입해왔습니다. 불어가 현대영어의 선배라고 한다면, 이태리어는 선배의 선배, 대선배라고나 할까요. (물론 지금은 이 '선배'들이 '후배'한테 어마어마한 수의 어휘를 역수입하고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만...) 불어나 이태리어나 같은 라틴어의 후예입니다만, 라틴어가 분열된 후에도 서로 많은 단어를 주고받은 것입니다. 심지어 불어로 '번호'를 뜻하는 뉘메로(numero) 역시 이태리어에서 온 단어입니다. '수'(數)를 뜻하는 농브르(nombre)가 멀쩡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즉 영어에서는 넘버(number)라고 부르는 것을 불어에서는 1번, 2번 할때는 뉘메로, 하나 둘 셋 할 때는 농브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탈리아 사람들만 아랍문화를 접했을 리가 없겠죠. 사실 15세기경 이탈리아를 경유해 들어온 zéro 말고도, 시프르라는 단어는 13세기에 프랑스에 이미 들어왔습니다. 이것이 라틴어로 시프라(cifra)라고 쓰여졌습니다. 사실, 유럽 공통으로 쓰였던 라틴어라고 해도, 그 발음은 언어권에 따라 매우 달랐기에, 이렇게 같은 라틴 자모로 옮기는 데에 있어서도 프랑스와 이탈리아 간의 차이가 있엇던 듯 합니다. 이 시프라는 처음에는 제로와 마찬가지로 0이라는 뜻이었습니다만, 0이라는 기호와 동시에 '아랍 숫자'(정확히는 인도 숫자)도 함께 들어왔던 것이었고, 점차 시프라는 그 의미가 확장되어 '아랍 숫자' 그 자체를 의미하게 되고, 나중에 가면 '숫자' 를 뜻하게 됩니다. 그만큼 0의 개념, 나아가 아랍 숫자 체계가 혁명적이었다는 것이겠죠. 이것이 현대 불어의 시프르(chiffre)입니다. 이렇게 의미가 확장되는 것을 언어학에서는 환유(換喩)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프르가 14세기에 불어에서 영어로 전래되면서 사이퍼(cipher)가 됩니다. 즉 영어는 똑같은 아랍 단어를 불어와 이태리어한테서 받아들인 셈입니다. 사이퍼는 지금도 '숫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만 '암호'라는 뜻도 있습니다. 디사이퍼(decipher)라고 하면 '해독하다'의 뜻입니다. 숫자와 암호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이것은 과거, 문서를 암호화하는 전형적인 수법이 문자를 숫자화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말했다시피 슌야타는 중국으로 넘어가면서 공(空)이라고 한역됩니다. 한 문명에서 파생한 개념이 서방에서는 수학적, 동방에서는 철학적 개념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참 흥미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전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럼 영(零)은 무엇일까? 인도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본디 0이라는 수적 개념이 있었던 것인가?
零이라는 글자를 뜯어보면 비 우(雨)와 하여금 영(令)으로, 딱히 어느 쪽도 숫자 0과 관련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사실 零은 원래 빗물이 똑똑 떨어지는 것을 의미했던 듯 합니다. 이 의미가 추상화되면서 '조금'이라는 뜻이 생겼죠. 왜, 작고 변변치 못하다는 뜻의 영세(零細)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영세 기업, 영세민 같이요. 이 단어에는 영의 '작다'는 의미가 살아있는 것으로, 즉 '작고 가늘다'는 것이 되겠죠.
그래서 零의 0이라는 뜻은 어디까지나 중국이 유럽수학과 접촉하면서 생긴 현대적인 의미인 것입니다. 언뜻 보면 '빗방울'이나 '작다'는 뜻과 '없다'는 뜻이 잘 연관이 되지 않습니다만, 빗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것을 상상해보자면, 처마에서 아주 적은 양으로 떨어지다가 곧 없어지고, 그 뒤에는 비가 그치고 맑은 하늘이 되니까요. 뭐 이런 '0으로 수렴한다'는 느낌에서 0이라는 의미로 전의(轉意)가 되었다고 상상할 수밖에 없네요. 어떻게 생각해 보면 그냥 '공(空)'으로 역하는 것이 역사적인 면에서는 더 어울리는 번역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실, 다른 한자권에서는 그러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0을 '공'이라고 읽는 일이 종종 있지 않습니까? 공공칠(007)같이요. 이 공이 그 空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 보면 한국에서 오히려 더 어울리는 역어를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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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발리섬의 아르주나상

아르주나(अर्जुन)는 힌두교의 산스크리트어 서사시인 <마하바라타 महाभारत>에 나오는 영웅이죠. 일본 애니 <지구소녀 아르쥬나 地球少女アルジュナ>로 들어보신 분들도 계실 듯 합니다.
참고로 <마하바라타>는 마하 + 바라타로 나눌 수 있는데, 여기서 '마하'라는 건 '大'라는 의미입니다. 라틴어의 '마그누스(Magnus)'생각하시면 됩니다. '마그나 카르타 Magna carta'라던가요. '바라타'는 '인도'란 뜻입니다. 사실 인도 사람들은, 남부의 드라비다족을 제외하면, 인도유럽어족 게열의 언어권에서는 대부분 자기 나라를 인디아라고 안 부르고 바라트Bharat라고 부르죠. 흥미롭게도, 인도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말레이시아어-인도네시아어(보통 합쳐서 마인어라고 부릅니다)에서는 바라트(Barat)가 '서쪽'이라는 뜻입니다. 이유는 당연히 인도가 얘네들 기준으로 서쪽에 있으니까.
'마하트마' 간디의 마하트마가 마하 + 아트마, 즉 '대혼(大魂)'입니다. 아트마(आत्म‍)라는 건 혼을 뜻하기도 하지만 '바람' 내지는 '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실은 후자의 의미가 먼저겠죠.) 독일어 아템(Atem) 역시 '숨'이라는 뜻입니다.
'숨'과 '혼'을 연결짓는 것은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퍼진 코드일지도 모릅니다. 신이 사람을 빚어 '숨'을 불어넣어 '혼'을 주었다는 헤브라이 신화처럼요. 산스크리트어와는 전혀 관계없는, 셈어 계통인 히브리어에서도 루아(רוח)도 마찬가지로 '숨'과 '혼'이라는 중의적인 뜻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이 구약성경을 번역할 때 그리스어를 거쳐 라틴어 스피리투스(spiritus)로 옮겨지는 계기가 되었고, 라틴어의 후예인 불어의 에스프리(esprit)를 지나 영어의 스피릿(spirit)이 되었습니다.
한편 '스피리투스'가 '숨'의 뜻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데, 같은 단어에서 아스피레(aspirer)라는 불단어 역시 갈라져나왔습니다. 아스피레는 '숨쉬다'와 '갈망하다'의 두 뜻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갈망할 때, 무언가를 향해 노력할 때 숨이 턱턱 차는 그런 느낌의 유추에서 '갈망하다'의 뜻이 갈라져 나왔으리라 상상해봅니다. 이것이 영단어 어스파이어(aspire)가 되었습니다만, 어스파이어에는 '숨쉬다'의 뜻은 쏙 빠지고 '갈망하다' '추구하다'만 남았죠. (한편 어스피레이션(aspiration) 같은 '호흡'에 연관된 파생단어도 있긴 합니다).
한국의 성경 초기 번역 중에는 '성령'을 '숨님'이라 번역한 경우도 있다고 한데, 이것이 히브리어 내지는 희랍/라틴어에 대한 어원적 고려 하에 택한 번역인지, 아니면 한국에도 원래 '숨=혼'이라는 신화적 공식이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실로 적절한 번역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얘기가 좀 샜군요. 어원 이야기의 특성상 이야기가 새는 것은 필연적이니 양해해 주시길 바래요.
우리의 아르주나로 돌아와 봅시다. 얘가 뭐하는 애인지에 대한 얘기는 제쳐두고, '아르주나' 자체는 '빛나는', '하얀', '은(銀)'의 뜻의 단어라고 합니다. 사실 고대신화에는 이렇게 일반명사가 신들을 지칭하는 고유명사 역할을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이건 나중에 더 자세히 얘기해보도록 하죠. 어쨌든 산스크리트어와 같은 인도유럽어족인 라틴어에도 동계어(同係語)가 있습니다만 그것은 '은'을 뜻하는 아르겐툼(argentum)입니다.
아르주나와 아르겐툼 둘 다 원시인도유럽어 어근 *h₂erǵ-에서 갈라져나온 것인데 이 어근은 '하얗다'는 뜻입니다. 하얗다고 은이냐? 원시인도유럽족에게는 그랬나 봅니다. 흑해 근처에 살았던 이 이름모를 원시부족한테 은이 그냥 하얗게 번쩍거리는 걸로 보이니 '저 허연 거'라고 불렀나 보죠.
비슷한 예로 영단어 골드(gold), 즉 황금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인구어(인도유럽어)어근 *ghel-에서 오는데, 이것은 '노랑, 초록'을 뜻하는 어근입니다. (한국어의 '푸른'이 '초록'을 의미하기도 하듯이 얘네들도 노랑과 초록을 그냥 한 색깔로 불렀나 보네요.) 여기에서 파생되는 또다른 영단어가 바로 옐로(yellow), 노랑입니다. 즉 원시인도유럽어를 썼던 부족에게 '하얀 건 은이요, 노란 건 금이로다'였던 거죠.
헌데 이게 제목에서 쓴 남미의 축구 잘하는 나라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16세기에 스페인 사람들과 포르투갈 사람들 사이에 '야 남미에 은산(銀山 Sierra de Plata)이 가득한 나라가 있다더라'라는 헛소문이 돌아서 다들 은을 찾아서 지금의 아르헨티나에 해당하는 곳으로 갔습니다만, 물론 전설처럼 딱히 은이 많지는 않았죠. 불어와 마찬가지로 라틴어의 후예인 스페인어입니다만 argentum이라는 단어는 그새 엿바꿔 먹고 plata라는 단어로 은을 부르고 있습니다. (불어에는 아르장(argent)이라는 단어가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이래뵈도 나라 이름인데 '은 많이 나는 동네' 따위로 부르면 폼이 안 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좀더 고상하게 라틴어 argentum의 여성형 형용사형인 argentina (나라 이름은 여성형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인도유럽어족에서 보편적으로 보이는 듯 합니다)를 써서, 그것을 스페인어식으로 읽은 것이 '아르헨티나'라는 이야기.

Posted by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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