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시대 선사(禪士) 하쿠인 에카쿠(白隠慧鶴)의 일원상(一円相)
Three, two, one, zero... 영어로 숫자를 세다보면 왠지 0을 나타내는 제로(zero)만 어딘가 형태가 좀 특별나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사실 영어에서 -o로 끝나는 단어가 그다지 많지 않지요. 이것은 다른 숫자는 영어의 고유 게르만 어휘에 속하는 반면 zero는 17세기라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탈리아어에서 들여왔기에 그런 것입니다. 이탈리아어의 남성명사는 거의 전부 다 -o 아니면 -e로 끝납니다. 젤라토(gelato), 카푸치노(cappucino), 에스프레소(espresso), 마니페스토(manifesto), 마니또(manito) 등등...
수학에는 젬병인 제가 수학 얘기를 하게 되는 것 같아서 좀 어색하군요. 어쨌든 영(0)이라는 숫자는 인도에서 발생해 유럽으로 건너온 것이라는 것은 한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정확히는 아랍문화를 거쳐서 들어왔지요. 13세기에 레오나르도 리보나치(Lenoardo Fibonacci)가 쓴 Liber Abaci에 0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Novem figure indorum he sunt 987654321. Cum his itaque novem figuris, et cum hoc signo 0 quod arabice zephirum appelatur.
아홉 가지의 인도 문자는 다음과 같다: 987654321. 그리고 이 아홉 문자에 더해, 아랍인들이 제피룸(zephirum)라고 부르는 0이라는 기호도 있다.발번역입니다. 죄송.
0이라는 기호를 지칭할 자국어가 딱히 없었기에 '아랍애들은 이렇게 부른다더라'고 한 것이죠.
기원이 되는 산스크리트어는 슌야(शून्य)입니다. 지금도 힌디어에서는 0을 슌야라고 합니다. 참고로 불교에서 공(空)이라고 하는 개념이 이것의 명사형 슌야타(शून्यता)의 번역입니다. (라틴어의 -tas, 독일어의 -teit, 영어의 -ty와 비슷한 명사형 어미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아랍인들이 받아들이면서 비슷한 개념인 시프르(صفر)로 번역했고 이것이 이탈리아에서 라틴어로 옮겨지면서 zefirum이 되고, 라틴어에서 이탈리아어화되면서 체피로(zefiro), 나아가 체로(zero)가 된 듯합니다. 흥미롭게도, 이슬람권인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에서도 말레이어로 0을 시파르(sifar)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불어에서도 0은 zéro라고 하지요. 영어가 불어에서 엄청나게 많은 단어를 받아들였지만, 불어 역시 이태리어에서 만만치 않은 어휘와 문법요소를 수입해왔습니다. 불어가 현대영어의 선배라고 한다면, 이태리어는 선배의 선배, 대선배라고나 할까요. (물론 지금은 이 '선배'들이 '후배'한테 어마어마한 수의 어휘를 역수입하고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만...) 불어나 이태리어나 같은 라틴어의 후예입니다만, 라틴어가 분열된 후에도 서로 많은 단어를 주고받은 것입니다. 심지어 불어로 '번호'를 뜻하는 뉘메로(numero) 역시 이태리어에서 온 단어입니다. '수'(數)를 뜻하는 농브르(nombre)가 멀쩡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즉 영어에서는 넘버(number)라고 부르는 것을 불어에서는 1번, 2번 할때는 뉘메로, 하나 둘 셋 할 때는 농브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탈리아 사람들만 아랍문화를 접했을 리가 없겠죠. 사실 15세기경 이탈리아를 경유해 들어온 zéro 말고도, 시프르라는 단어는 13세기에 프랑스에 이미 들어왔습니다. 이것이 라틴어로 시프라(cifra)라고 쓰여졌습니다. 사실, 유럽 공통으로 쓰였던 라틴어라고 해도, 그 발음은 언어권에 따라 매우 달랐기에, 이렇게 같은 라틴 자모로 옮기는 데에 있어서도 프랑스와 이탈리아 간의 차이가 있엇던 듯 합니다. 이 시프라는 처음에는 제로와 마찬가지로 0이라는 뜻이었습니다만, 0이라는 기호와 동시에 '아랍 숫자'(정확히는 인도 숫자)도 함께 들어왔던 것이었고, 점차 시프라는 그 의미가 확장되어 '아랍 숫자' 그 자체를 의미하게 되고, 나중에 가면 '숫자' 를 뜻하게 됩니다. 그만큼 0의 개념, 나아가 아랍 숫자 체계가 혁명적이었다는 것이겠죠. 이것이 현대 불어의 시프르(chiffre)입니다. 이렇게 의미가 확장되는 것을 언어학에서는 환유(換喩)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프르가 14세기에 불어에서 영어로 전래되면서 사이퍼(cipher)가 됩니다. 즉 영어는 똑같은 아랍 단어를 불어와 이태리어한테서 받아들인 셈입니다. 사이퍼는 지금도 '숫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만 '암호'라는 뜻도 있습니다. 디사이퍼(decipher)라고 하면 '해독하다'의 뜻입니다. 숫자와 암호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이것은 과거, 문서를 암호화하는 전형적인 수법이 문자를 숫자화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말했다시피 슌야타는 중국으로 넘어가면서 공(空)이라고 한역됩니다. 한 문명에서 파생한 개념이 서방에서는 수학적, 동방에서는 철학적 개념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참 흥미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전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럼 영(零)은 무엇일까? 인도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본디 0이라는 수적 개념이 있었던 것인가?
零이라는 글자를 뜯어보면 비 우(雨)와 하여금 영(令)으로, 딱히 어느 쪽도 숫자 0과 관련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사실 零은 원래 빗물이 똑똑 떨어지는 것을 의미했던 듯 합니다. 이 의미가 추상화되면서 '조금'이라는 뜻이 생겼죠. 왜, 작고 변변치 못하다는 뜻의 영세(零細)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영세 기업, 영세민 같이요. 이 단어에는 영의 '작다'는 의미가 살아있는 것으로, 즉 '작고 가늘다'는 것이 되겠죠.
그래서 零의 0이라는 뜻은 어디까지나 중국이 유럽수학과 접촉하면서 생긴 현대적인 의미인 것입니다. 언뜻 보면 '빗방울'이나 '작다'는 뜻과 '없다'는 뜻이 잘 연관이 되지 않습니다만, 빗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것을 상상해보자면, 처마에서 아주 적은 양으로 떨어지다가 곧 없어지고, 그 뒤에는 비가 그치고 맑은 하늘이 되니까요. 뭐 이런 '0으로 수렴한다'는 느낌에서 0이라는 의미로 전의(轉意)가 되었다고 상상할 수밖에 없네요. 어떻게 생각해 보면 그냥 '공(空)'으로 역하는 것이 역사적인 면에서는 더 어울리는 번역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실, 다른 한자권에서는 그러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0을 '공'이라고 읽는 일이 종종 있지 않습니까? 공공칠(007)같이요. 이 공이 그 空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 보면 한국에서 오히려 더 어울리는 역어를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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