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 가면 칩사이드(Cheapside)라는 거리가 있습니다. 영국의 지명이 원래 좀 괴상하긴 하지만, 칩사이드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좀 웃긴 이름이죠. 치프(cheap)라니, 그 거리의 집은 집값이 싼 것일까?
현대영어에서 '저렴하다'를 의미하는 치프(cheap)는 '거래' 혹은 '시장'을 뜻하는 고대영어 ceap에서 왔습니다. '잘 한 거래', 즉 god ceap(good cheap)를 관용적으로 사용하다 보니 아예 ceap 자체가 저렴함을 뜻하게 된 것이죠. 즉 칩사이드는 싸구려 거리가 아닌, 아마도 장이 서는 시장거리였던 것이겠죠.
또 행상인을 뜻하는 챕맨(chapman)도 ceapmann에서 온 것입니다. 영국하고 호주에서 그냥 아무 남자나 부를 때 챕(chap)이라고 부르는 것도 챕맨의 축약형이구요.
그럼 ceap은 어디서 왔는지 살펴봅시다. 라틴어로 '소상인', '행상인', '여관주인'등을 의미하는 caupo에서 빌려온 것이라 합니다.
영어가 라틴어에서 엄청나게 많은 수의 단어를 빌려온 것은 맞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서 꾸준히 들어왔고 라틴어에서 직접 들여온 것, 불어/이태리어를 경유해서 들여온 것 등 같은 라틴계 단어라도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한국어의 한자 단어라도, 초기에 들어와서 한자 규범의식이 사라진 것('묵墨 -> 먹', '필筆 -> 붓' 같은 예)부터 시작해서, 중국에서 바로 들여온 것, 한자가 아니라 중국어 발음만을 들여온 것('백채白菜 -> 배추' 같은 예), 또 20세기에 대량으로 들어온 Made in Japan의 '일본계 한자어' 등으로 나뉘듯이요. 영어의 라틴계 단어 역시 '프랑스계 라틴단어'가 많지만 caupo->ceap같이 이렇게 직접 라틴어에서 들여온 단어도 꽤나 많은 것이죠.
이런 '직접적' 라틴 차용어로는 부엌을 뜻하는 키친(kitchen)이 있습니다. 속(俗)라틴어 (로마제국 쇠퇴 후 민중에게 널리 퍼져 변화한 라틴어)의 cocina에서 빌려온 것인데, 영단어에는 '요리'를 뜻하는 단어 퀴진(cuisine)도 있습니다. 이것은 불어의 퀴진에서 그대로 빌려온 것인데 이 불단어도 cocina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라틴어에서 직접 온 단어와, 불어를 한 단계 거쳐서 온 단어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죠.
관련없는 얘기가 길어졌습니다만 그저 '영어의 라틴계 차용어'가 매우 다양한 차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미리 말해두고 싶었습니다. 어쨌든 caupo로 돌아가보면 영어뿐만이 아니라 다른 게르만어도 이 단어를 빌려왔습니다. 독일어의 카우픈(kaufen)이 있는데 이 단어는 영어의 치프처럼 뜻이 요상하게 변하지 않고 '구매하다'라는 그나마 원의에 좀 가까운 의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애들은 게르만족 애들이 빌려쓴 단어를 걔네들한테서 또 빌려썼는데 러시아어의 쿠피치(купить)가 그것입니다. 뜻은 마찬가지로 '구매하다'.
덴마크가 어디 붙어있는 나라인지 아시나요? 독일 지도를 보면 위에 뿔처럼 나 있는 영토가 있는데 거기가 덴마크입니다. 덴마크어 역시 독일어, 영어와 사촌뻘인 게르만어죠. 그러다보니 독일어 kaufen과 마찬가지로 쾨베(købe)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사실 덴마크의 수도를 부르는 '코펜하겐'(Copenhagen)은 영어 발음이고 덴마크어로는 쾨벤하운(København). 여기서 하운(havn)은 영어의 헤이븐(haven: 피난항, 정박소)과 유사한 '항구'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러니 '쾨벤하운'은 사다 + 항구 = 무역항이 되는 것이지요.